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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 서양

경이는 문인가, 집인가: 타우마제인과 수피의 하이라

시차·2026년 7월 25일·9분 읽기

고대 아테네, 테아이테토스라는 젊은 학생이 수학 문제 앞에서 멈춰 선다. 맞은편에는 소크라테스가 있다. 소년은 자기가 빠진 혼란을 거의 부끄러워한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미소를 지으며 전혀 뜻밖의 말을 건넨다. “그 느낌, 그 놀라움이야말로 철학자에게 어울리는 것이네. 철학은 다른 어디에서도 아니라 오직 놀라움에서 태어나니까.”

플라톤은 이 장면을 『테아이테토스』에 담고 곧바로 아름다운 신화 하나를 덧붙인다. 놀라움의 신 타우마스의 딸이 무지개의 여신 이리스라는 것. 놀라움은 땅과 하늘을 잇는 다리 그 자체라는 뜻이다. 경이는 인간을 더 높은 실재에 매어 두는 색색의 활이다.

경이는 거의 모든 사유 전통이 떠받드는 것이다. 그러나 “경이는 무엇에 쓰이는가”라는 물음 앞에서 길이 갈라진다. 그리고 그 갈라짐은 짐작보다 훨씬 깊다. 여기서 고대 그리스 철학과 수피 이슬람 전통이 마주 선다. 둘 다 경이를 신성하게 여기지만, 그것을 정반대 방향으로 쓴다.

문이 된 경이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의 첫 문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모든 인간은 본성상 알고자 한다.” 그리고 이 앎의 욕망에 불을 붙이는 것이 ’타우마제인’이다. 놀람, 경이, 무언가 앞에서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며 굳어 버리는 상태.

타우마제인은 단순한 호기심과 다르다. 말보다 먼저 오는 경탄이다. 존재가 존재한다는 사실 앞에서 벙어리가 되는 일이다.

소크라테스의 방법 전체가 이 감정 위에 서 있다. 그는 아테네 광장을 걸어 다니며 사람들에게 묻는다. 확신에 찬 사람을 어떤 지점까지 몰고 가서 결국 “사실 나는 이것을 몰랐군요”라는 말을 듣게 한다. 바로 그 순간, 그 불편한 당황의 순간이 진짜 사유가 시작되는 자리다.

그리스적 이해에서 경이는 문이다. 가던 길을 멈춰 세우면서 동시에 통과하기를 요구하는 문턱을 만든다. 그 안에 머물 수는 없다. 그곳을 지나 답을 향해 걸어가야 한다.

이렇게 보면 그리스인에게 경이는 시작이지 도착이 아니다. 놀라움은 사람을 움직이고, 묻게 하고, 탐구로 밀어붙이기 때문에 값지다. 불꽃과 같다. 아름답지만 본래 목적은 불을 붙이는 것이다. 불꽃 자체에 붙들려 굳어 버리는 일은 그리스적 정신에게 사유가 중간에 끊긴다는 뜻이었다.

이 시선의 결과는 엄청났다. 아이가 “하늘은 왜 파래요”라고 묻는 것과 과학자가 빛의 파장을 측정하는 것은 같은 충동의 양 끝이다. 그리스 전통은 이 충동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하나의 방법으로 바꾸었다. 관찰하고, 의심하고, 증명하고, 다시 묻는다.

탈레스가 별을 보다가 구덩이에 빠진 일, 아르키메데스가 욕조에서 “찾았다”고 외친 일은 같은 경이의 다른 장면이다. 여기서 경이는 감정이기를 그치고 규율이 된다. 그리고 그 규율이 끝내 서양 과학 전체의 토대가 된다.

다만 서양 사유가 경이를 늘 문으로만 본 것은 아니다. 여러 세기 뒤 비트겐슈타인은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 앞의 놀라움을 삶의 가장 깊은 물음으로 여겼다. 하이데거는 이를 가장 평범한 것의 비범함이라 부른다. 하늘이 파랗다는 데 대한 놀라움이 아니라, 하늘이 있다는 데 대한 놀라움이다. 답을 향해 달려가는 호기심이 아니라, 수피의 것처럼 존재 앞에 그대로 멈춰 서는 경이다. 문인 줄 알았던 것이 때로는 문턱이 아니라 창이다.

집이 된 경이

수피 전통에서 경이는 전혀 다른 것이다. 길의 시작이 아니라 아마도 끝이며, 어쩌면 끝 너머다. 수피의 여정에는 ’머무는 자리’들이 있다. 영혼이 지나는 정거장이다. 회개가 오고, 인내가 오고, 사랑이 오고, 황홀이 온다. 그런데 하이라, 곧 경이는 이 모든 것 위 가장 높은 자리에 놓인다. 시작의 불꽃이 아니라 다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점이다.

메블라나 잘랄루딘 루미는 이것을 말하려다 언어가 모자란다는 사실을 본다. 그래서 “경이, 경이, 경이, 나의 경이”라고 되풀이한다. 이 반복은 말실수가 아니다. 낱말이 실어야 할 의미를 실어 나르지 못한다는 정직한 고백이다.

경이의 순간에 사람은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기를 그친다. 그 순간 묻는 자도 답도 함께 녹기 때문이다. 둘이 하나가 된다. 그리고 이 상태를 말로 편안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아직 진짜로 겪은 것이 아니라고 이 전통은 본다.

선방에서 화두를 받는 사람도 비슷한 자리에 놓인다. 화두는 풀라고 주는 물음이 아니다. 답 없이 끌어안고 있으라고 주는 물음이다. 의심이 자라 덩어리가 되면 먼저 무너지는 쪽은 물음이 아니라 묻는 사람이다.

이 태도의 가장 인상적인 예는 아마 가잘리일 것이다. 바그다드 최고의 학교에서 수백 명을 가르치던, 당대 가장 명석한 논증가였던 사람이 서른여섯에 깊은 위기에 빠진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어느 날 혀가 굳어 강의를 할 수 없게 된다. 그는 강단과 명성과 재산을 두고 가난한 탁발승으로 길을 떠난다.

그가 도달한 결론은 이랬다. 가장 확실한 앎은 논증이 아니라 ’맛봄’으로만 온다. 꿀맛은 설명에 담기지 않는다. 직접 맛봐야 한다. 그에게 신도 그러했다. 증명할 명제가 아니라 맛볼 진리였다.

원효 역시 당으로 가던 길 위에서 앎의 방향을 바꾼 사람이다. 어둠 속에서 달게 마신 물이 날이 밝자 해골에 고인 물이었음을 알고, 그는 배움을 구하러 가던 걸음을 되돌린다. 스승을 찾아 국경을 넘는 대신 자기가 겪은 것 안에 남았다. 두 사람 모두 시대의 가장 뛰어난 학인이었고, 두 사람 모두 어느 날 학인의 자리를 내려놓았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이것이다. 수피의 경이는 답 없음을 상실이 아니라 만남으로 산다. 한 사람이 여러 해 동안 자기 물음을 뒤쫓고, 답마다 그 뒤에서 새 물음을 발견하다가, 어느 날 묻는 행위 자체가 물음 속으로 녹아드는 지점에 이른다고 해 보자. 그리스인에게 그곳은 막다른 골목이다. 수피에게는 도착지다.

두 전통은 같은 낭떠러지 가장자리에 선다. 그러나 하나는 뒤로 물러나 다리를 놓으려 하고, 다른 하나는 팔을 벌려 그 빈 곳으로 자신을 놓는다. 이상한 것은 둘 다 이 움직임에서 일종의 평온을 얻는다는 점이다. 하나는 이해의 평온을, 다른 하나는 내맡김의 평온을.

두 전통을 나란히 놓으면 한 가지 물음이 남는다. 어떻게 같은 감정이 이토록 반대되는 자리에 이르는가. 답은 이성과 언어에 대한 신뢰에 숨어 있다. 그리스 사유는 로고스를, 곧 이성과 말을 믿는다. 경이는 대화를 시작한다. 철학은 놀라움에서 태어난 논리다.

수피 전통은 언어와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려 한다. 그에게 경이는 바로 말이 끝나는 곳에서 의미를 얻는다. 이것은 임의의 문화적 취향이 아니다. 두 전통 사이의 거리는 사실 이성이 신에게 얼마나 가까이 갈 수 있는가에 대한 뿌리 깊은 믿음의 차이다. 그리스인에게 신적인 것은 이성으로 파악될 수 있다. 수피에게 이성은 신으로 가는 길 어느 지점에서 뒤에 두고 가야 할 경계다.

흥미로운 점은 모름을 지혜로 바꾼 것이 동방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중세 서양에도 그것을 부르는 이름이 있었다. ‘아는 무지’(docta ignorantia). 독일 사상가 쿠자누스는 이를 아름다운 기하로 설명한다. 원 안에 그려 넣은 다각형. 변을 아무리 늘려도 다각형은 원에 가까워질 뿐 결코 원이 되지 않는다. 우리의 이성이 그 다각형이고, 진리는 원이다. 가장 큰 지혜는 이 거리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일이다.

S.K.C.가 2026년 1월 12일 빈에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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