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보려면 구독하세요

새로운 동서양 에세이, 매주.

감사합니다 — 구독이 완료되었습니다.

구독에 실패했습니다 — 다시 시도해 주세요.

동양 × 서양

멘토는 왜 거의 말하지 않았을까

언정수·2026년 7월 26일·10분 읽기

어제저녁 크리스토퍼 놀런의 오디세이아를 봤다. 멘토라는 인물이 죽는 장면에서 생각이 엉뚱한 데로 갔다.

내가 다니는 회사에는 멘토 제도가 있다.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면 그에게 멘토가 한 명 배정된다. 그 사람이 신입의 온보딩을 맡고, 특히 첫 몇 달 동안 일의 문서화되지 않은 부분을 알려준다.

제도의 이름은 멘토지만, 하는 일은 사수가 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어두운 극장 안에서 이상한 질문이 하나 걸렸다. 이 단어는 정말 오디세이아에서 온 걸까. 멘토의 첫 쓰임이 오디세이아의 저 인물인가. 사이트의 어원 코너에 어울리는 글감이었다.

집에 와서 찾아봤다. 답은 그렇다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답이 아니라 답 뒤에 있는 사정이었다.

오디세이아의 멘토는 거의 입을 열지 않는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멘토는 오디세우스의 오랜 친구다. 오디세우스는 트로이아로 떠나면서 집과 아들 텔레마코스를 그에게 맡긴다.

상식적으로는 이렇게 예상하게 된다. 멘토가 서사시 내내 곁에 있고, 아이에게 조언하고, 긴 이야기를 들려주리라고.

그렇지 않다.

멘토가 본문에서 거의 대사를 얻지 못한다는 걸 알아차리고 나서 나는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텔레마코스를 실제로 이끄는 존재는 아테나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이 구분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여신은 때때로 멘토의 모습을 빌려 나타난다. 목소리는 멘토의 것이고 얼굴도 멘토의 것이지만, 안에서 말하는 이는 지혜의 여신이다.

그러니까 서사시의 ’멘토’는 사실 가면이다. 이끄는 사람이 아니라, 이끎이 입은 형태다.

이천팔백 년이 지나 우리 회사 인사팀은 우연히 이 단어를 골랐다. 정작 그 이름의 주인은 자기 서사시에서 제대로 된 말 한 번을 하지 못했다.

호메로스의 세계에서 이름은 말한다

이걸 이해하려면 고대 그리스가 이름을 어떻게 봤는지 알아야 한다.

호메로스의 세계에서 이름은 임의의 딱지가 아니다. 이름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안에 담고 있다.

이런 이름을 여행가방 같은 말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옷장을 떠올리면 된다. 밖에서는 단어 하나만 보이지만, 열면 접힌 채 들어 있던 여러 겹의 뜻이 쏟아진다. 인물의 핵심이 그 단어 안에 눌러 담겨 있다.

라틴어에 이를 가리키는 말이 있다. nomen est omen. 이름은 곧 예언이다.

’멘토’도 그런 종류의 이름이다.

이 단어는 인도유럽조어의 뿌리 *men- 위에 서 있다. 뜻은 생각하다, 헤아리다. 그리스어에서는 menos로 살아 있다. 마음, 정신, 생기라는 뜻이다.

즉 멘토라는 이름은 곧이곧대로 옮기면 ‘생각하는 사람’ 또는 ’헤아려 주는 사람’이다.

호메로스가 이 인물을 안내자로 만들기 전에, 이름이 이미 그를 안내자로 선언해 두었다. 무대에 오를 필요조차 없었다.

같은 뿌리의 두 끝

이것도 찾아냈는데, 솔직히 조금 서늘했다.

*men- 뿌리는 라틴어로 넘어가 mens가 됐다. 마음, 지성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오늘날 누구나 아는 단어가 태어났다. dementia. de-(멀어짐)에 mens(마음)가 붙은 말이다.

마음에서 멀어짐.

멘토와 dementia는 같은 선사시대의 소리에서 갈라진 두 형제다. 하나는 마음이 누군가에게 선물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이 손에서 빠져나가는 일이다. 한 뿌리에서 나와 정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이 뿌리는 산스크리트어에서도 계속 산다. manas다. 인도 철학에서 manas는 생각의 원재료다. 쉬지 않고 돌아가며 인상을 모으는 마음의 층이다. 우파니샤드에서도, 불교 심리학에서도 늘 같은 자리에 선다. 그 소리는 한자로 옮겨져 말나(末那)라는 이름으로 굳었다.

같은 소리가 지중해에서는 서사시 인물의 이름이 되고, 남아시아에서는 인간 의식의 기본 용어가 됐다. 거리는 수천 킬로미터인데 뿌리는 하나다.

회사에는 왜 멘토 제도가 있을까

여기서 진짜 질문에 닿는다. 회사의 그 제도가 왜 존재하느냐는 질문이다.

새로 온 사람에게 문서를 줄 수는 있다. 프로세스 맵, 툴 목록, 온보딩 위키. 전부 적혀 있고 전부 열람할 수 있다.

어느 회의에 들어가는 게 실제로 중요한지,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다가가야 하는지, 메일을 언제 보내야 하는지, 반대 의견을 어떤 톤으로 꺼내야 하는지. 이런 건 어떤 문서도 알려주지 않는다.

이런 종류의 앎을 암묵지라고 부른다. 헝가리 태생의 영국 과학자이자 철학자 마이클 폴라니의 정의로는, 우리가 알지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된다. 자전거를 탈 줄 아는 사람이 그것을 글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균형, 페달, 핸들. 전부 적어 놓아도 그 글로는 자전거를 탈 수 없다. 앎은 낱말이 아니라 몸에 산다.

폴라니 자신의 예는 더 강렬하다. 우리는 수천 개의 얼굴 가운데 한 사람의 얼굴을 알아본다. 그러나 그 얼굴을 어떻게 알아보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설명하려 들면 마른 형용사 몇 개만 손에 남는다. 알아보는 것과 묘사할 수 있는 것은 다르다.

회사에서도 쓰인 말과 살아 있는 감각은 다른 것이다. 아는 것 전부가 적히지는 않는다. 어떤 것들은 애초에 적히기에 알맞지 않다. 회사처럼 살아 움직이며 변하는 조직에서는 모든 것을 틀에 넣어 쓸 수 없다. 쓴다 해도, 신입이 그 문서를 펼치는 순간의 현실은 이미 다른 것이 되어 있을 수 있다.

직장 생활의 큰 부분이 그렇게 굴러간다. 그리고 글로 옮겨지지 않는 앎에는 전달 통로가 하나뿐이다. 누군가의 옆에 서 있는 것.

신입의 첫 몇 달을 사수 옆자리에 붙여 두는 관행도 결국 같은 이치다. 자리를 붙여 놓아야만 건너가는 것이 있다.

멘토라는 제도가 왜 이렇게 오래됐는지에 대한 답도 여기 있다. 그저 경영 유행이 아니다. 인류의 가장 오래된 전달 문제에 주어진 가장 오래된 해법이다.

이름이 소문자로 내려앉을 때

고유명사가 보통명사로 내려앉으면서도 값을 잃지 않는 경우는 역사에 아주 드물다.

나르키소스는 신화 속 인물이었고, 나르시시즘은 성격을 가리키는 말이 됐다. 오디세이아는 서사시의 제목이었고, 영어의 odyssey는 길고 고된 여정을 뜻한다. 멘토는 서사시의 한 인물이었고, 오늘날 여러 언어에서 같은 관계의 이름이 됐다.

이 이동이 왜 일어나는지 생각해 봤다. 답은 아마 이것이다.

개념은 낱말보다 먼저 있다.

사람들은 수천 년 동안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를 살아왔다. 장인은 도제를 길렀고, 나이 든 이가 젊은 이에게 주의를 주었고, 겪어 본 사람이 겪어 보지 않은 사람 옆에 섰다. 다만 그 관계에는 또렷한 이름이 없었다.

호메로스가 한 인물에게 그 이름을 붙였을 때, 이름은 비어 있던 자리에 앉았다. 어찌나 잘 맞았는지, 시간이 지나며 인물이 아니라 개념을 가리키게 됐다.

이걸 가능하게 한 건 뿌리의 투명함이었다. 고대 그리스 사람은 이 이름을 들으면 ’마음이 있는, 헤아려 주는’이라는 울림을 저절로 받았다.

뜻은 숨어 있지 않았다. 이름 자체가 뜻을 들고 서 있었다.

한국어로 건너오면서 그 투명함은 사라졌다. ’멘토’는 소리만 넘어온 외래어라 안에 무엇이 접혀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뜻을 품은 이름이 아니라 뜻을 가리키는 표가 된 셈이다.

개념을 안에 품은 이름은 언젠가 개념 자체가 될 수밖에 없다.

크리스토퍼 놀런의 오디세이아 속 한 인물의 한 장면이 이 모든 생각을 불러왔다.

아이러니는 여기 있다. 서사시에서도 영화에서도 가장 적게 말하는 인물이 오늘날 모든 사무실에서 쓰이는 단어의 바탕이 됐다. 어쩌면 좋은 이끎이란 원래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많이 말하는 쪽이 아니라, 옆에 서 있는 쪽.

2026.07.26 빈에서 S.K.C.가 썼다.
마음에 드셨다면 더 둘러보기

© 2026 eastwestmindset — 모든 권리 보유. 이 사이트의 글을 사용하려면 사전 허가가 필요합니다.